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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lections/Thoughts, Musings

낭만을 좇아

haafter 2021. 5. 26. 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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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니? 지금 눈이 펑펑 내려. 잠시 내려와 엄마랑 산책하자.”

“춥자나요.”

“그래도 낭만 있잖아.”

 

마지못해 주섬거리며 옷을 입었다. ‘추운데..’를 반복거리며 툴툴대는 내 모습에서 ‘낭만’이란 한 방울도 남지 않은 냉혈한의 기운이 느껴졌다.

 

잠시만. 도대체 낭만이 뭔데?

원초적 질문에 가장 먼저 들어 재끼는 국어사전에 따르면 낭만이란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를 뜻한다고 한다.

 

올해 딱 만 서른살이 된 91년생 나에게 ‘낭만’이란 뭘까.

평일 오후 햇살 스며드는 카페에서 책 한권 찐하게 음미하는 여유로움? 혹은 핫플에서 친구들과 의미 없는 사진을 찍어대며 하염없이 떠들어 대는 수다나 막 오픈한 분위기 좋은 바에서 이름 모를 위스키 한잔 홀짝이며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재즈를 감상하는 척하는 뭐.. 그런 것?

 

그렇다면 30년 앞선 61년생 엄마가 말하는 낭만은?

당신 입으로 ‘난 낭만 있는 사람’이라 주장하는 그녀의 경우, 옆에서 그녀의 삶을 면밀히 뜯어보지 않는 한 도저히 낭만 있는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나의 무관심이 컸겠지만 ‘낭만’ 자체에 대한 해석과 가치가 달랐을 수도 있다. 그녀의 관점에서 ‘낭만있는 삶’과 그 의미에 대해 기록해 보고자 한다.

 

1. 그땐 태명도 없었다는데..

요즘과는 달리 내가 태어날때 즈음엔, 그니까 엄마가 막 30대에 진입했고 처음으로 ‘엄마’가 되던 시기에는 뱃속 아기에게 태명을 지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태아를 부르는 애칭을 만드는 문화가 없었다고 하는데, 이 얼마나 낭만 '없는' 삶인가? 

가족끼리 조촐하게 보내고 있던 생일날, ‘내 태명은 뭐였어?’라는 나의 질문에 ‘그 당시엔 그런거 안했어~’란 무심한 대답이 돌아온 것은 심심한 충격이었다. 엄마의 변으로는 그땐 태명에 대한 개념이 없어 이름을 미리 지어 부르거나 그냥 ‘아가야~’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기가 실제 세상에 태어나 한 평생 불리게 될 이름과 당장 태아 속 아기에게 인격을 부여해 사랑을 담은 애칭으로 부를 수 있도록 하는 태명을 구분하는 '요즘 시대의 낭만'과는 매우 결이 다른, 아니 낭만 자체가 결여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그렇게 태명 없이 태어난 아기는 곧 그녀의 세상이 되고, 희망이 되어 갔다. 

 

2. 딸이 팔아버린 피아노가 안타까운 이유

중학생때 엄마아빠를 졸라 샀던 중고 피아노를 갓 스무살이 되어 팔아 벌인 사건이 있다. 그 당시 난 엄마와 아빠, 그리고 동생까지 집안 그 누구도 피아노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아노가 온전히 나의 소유물이라 여겼다. 용돈이 부족해 급하다는 이유로 집안의 재산을 멋대로 팔아버린 나름의 이유였다. 

그 당시 피아노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온 집안, 심지어 친척들까지 난리가 났다. 한동안 해당 사건은 엄마 아빠 친구들에게까지도 회자됐고 난 정말 큰 잘못을 저지른 철없는 딸이 되어버렸다. 이후 피아노 관련된 얘기만 나오면 의기소침해지는 나에게 엄마가 해준 한마디는 나를 드디어 '철들게' 했다.

 

“피아노를 판게 아까워서 그러는게 아니라 이제는 더이상 우리 딸이 치던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를 듣지 못하는게 슬퍼서 그런단다. 쉬는 날이면 거실까지 흘러 나오던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엄마에겐 힐링이었는데 말이야.”

 

엄마에게 내 어설픈 피아노 연주는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름다운 선율이자 퍽퍽한 삶의 희망이 되었으리라.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던 아기가 벌써 피아노로 엄마를 위로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니. 중고 피아노는 단순 재산의 의미를 넘어 엄마에게는 삶에 낭만 한줄기가 되어준 것일텐데. 그걸 팔아 먹다니.. 지금 생각해도 난 철이 없었..지만 나름 귀여운 것 같다. 

 

3. 설거지 넘어의 단단한 희망

시간이 흘러 5년 간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고 백수가 된 나는 엄마 아빠 집에 딱 달라 붙어 지내며 최소한의 노동력, 가령 평소엔 하지도 않던 집안일이나 애교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사의 경우 특히 설거지를 거의 다 도맡아 하고 있는데, 그때서야 알았다. 왜 사람들이 너도 나도 식기세척기를 구매하는지. 매일 매일 나오는 어마어마한 설거지 양에 심신이 지쳐 갔고 한편으론 '엄마는 일도 하면서 이걸 어떻게 다 했지'라며 경외심이 커져가고 있었다.

 

어느 날 독립한 동생 제외 세식구 밖에 안되는데에 비해 말도 안되게 너무 많이 나온 설거지 양에 에휴. 나도 모르게 한숨이 크게 나왔다. 뒤에서 지켜보던 엄마가 조용히 다가오더니 싱크대 앞 작은 창문을 슬쩍 여시며, “힘들 땐 저걸 보며 희망을 가져!” 하신다. 방충망 사이로 보이는건 살랑 살랑 흔들리는 목련 가지의 꽃봉우리였다. 추운 겨울 가장 먼저 핀다는, 춥지만 꽃을 피우려 고단히 노력하면서 자신을 단단하게 지키고 있는 희망의 꽃봉우리.

이게 60년대생의 낭만이고, 삶의 지혜다.

엄마에게 낭만이란 모든게 얼어 붙어버린 추운 겨울 속에서도 꽃을 피우려 고단히 노력하며 자신을 단단하게 하는, 희망의 꽃봉우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 한마디였다. 

 

대게 낭만이란 먼 미래, 현재를 돌아 봤을 때 꿈같은 이상과 희망을, 그리고 안도와 위로를 주며 한때 스쳐 지나갔던 청춘의 조각을 회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낭만’은 젊음의 싱그러움과 아련한 추억을 동시에 선사하는 삶의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닌가 싶다.

삶의 낭만들이 모여 비소로 반짝반짝 빛나는 인생을 만들고, 동시에 지금을 살아내게 하는 힘이 되어 주는 것이다.

 

오늘도 엄마가 그녀의 낭만을 나'랑만’ 공유함에서 벗어나 그녀의 감성을 많은 이들에게 공감할 수 있도록  잘 지켜내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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